동짓날 팥죽에 담긴 시간의 이야기
겨울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음식을 찾는다. 그중에서도 동짓날의 팥죽은 단순한 계절 음식이 아니다. 동지 팥죽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사람들의 두려움과 바람,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겨 있다.

동지는 1년 중 밤이 가장 길다. 해가 가장 늦게 뜨고 가장 빨리 지는 날이다. 옛사람들에게 이 긴 어둠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불안의 시간이었다. 밤이 길수록 음기가 강해지고, 그 틈을 타 좋지 않은 기운이 스며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지는 늘 조심스럽고 경계해야 할 날이었다.
이 긴 밤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선택된 음식이 바로 팥죽이었다. 팥의 붉은색은 오래전부터 귀신과 재앙을 쫓는 색으로 여겨졌다. 붉은색은 피와 생명을 상징했고, 동시에 나쁜 기운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색이었다. 동짓날 팥죽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종의 방패였다.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동지 팥죽은 먹기 전부터 의미를 가진 음식이었다. 팥죽을 쑤면 바로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먼저 집 안 곳곳에 팥죽을 놓았다. 대문 앞, 부엌, 장독대, 방의 네 모퉁이에 작은 그릇으로 팥죽을 나누어 두었다. 집 안으로 들어올지 모를 액운을 미리 막아두는 행위였다. 그다음에야 조상에게 팥죽을 올리고,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다.
동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작은 설’이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면 다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옛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의 날이었다. 한 해의 기운이 다시 태어나는 날, 팥죽 한 그릇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며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팥죽 속 새알심이 작은 놀이이자 의식이었다. 가족 수에 맞춰 새알심을 세고, 나이에 맞게 그릇에 담아주며 “올해도 무사히 자라라”는 마음을 전했다. 팥죽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족을 묶고,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팥죽으로 귀신을 쫓는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동짓날 팥죽을 끓이는 집은 여전히 많다. 그 이유는 어쩌면 변하지 않았다. 가장 어두운 계절의 한가운데서, 따뜻한 음식을 나누며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기 위해서다.
동지 팥죽은 오래된 미신이 아니라, 겨울을 건너는 방식에 대한 지혜다. 긴 밤을 견뎌낸 뒤 다시 밝아질 시간을 믿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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