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화폐제도의 ‘현실적 실패’와 일제강점기 통화 팽창의 구조
“근대 화폐제도”는 법령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한제국이 근대 화폐제도를 꿈꾼 건 사실이다. 은화·금화·은행권 논의까지 이어졌고, 결국 1901년엔 금본위 규정과 단위(환, 圜)를 명시한 법령(화폐조례)까지 선포했다.
하지만 시장은 법령보다 냉정했다. 준비금·발행 통제·유통 관리가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근대 제도”를 선언해도 실제 통화는 흔들린다. 그 결과가 바로 “백동화 인플레이션”으로 상징되는 폐제(幣制) 문란이었다.
이 글은 4개의 질문으로 근대 화폐의 “작동 실패”를 해부한다.
- 전환국은 왜 보조화를 대량 주조했나?
- 백동화 인플레는 어떻게 “동전”으로 발생했나?
- 화폐조례는 왜 현실에서 작동하지 못했나?
- 일제강점기 조선은행권은 왜 전쟁기 통화 팽창의 엔진이 되었나?
1. 전환국: 조폐기관은 “국가의 심장”이 될 수도, “불안의 공장”이 될 수도 있다
1-1. 전환국은 무엇이었나?
전환국은 조선 정부가 상설 조폐기관을 만들기 위해 설립한 기구로, 기존 임시 주전소 방식에서 벗어나 “통화정책을 보다 합리적으로 운용”하려는 시도였다.
즉, 전환국 자체는 근대 국가로 가는 ‘필수 시설’이었다.
1-2. 인천 전환국에서 실제로 주조된 화폐
인천시립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인천 전환국(1892~1900)은 5냥 은화·1냥 은화·2전5푼 백동화·5분 적동화·1분 동화 등 여러 종을 주조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제도 설계”가 아니라 현장에서 찍어낸 화폐의 구성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 백동화 인플레이션: ‘지폐가 아닌 동전’이 물가를 폭등시킨 사건
2-1. 백동화 인플레는 실제로 얼마나 심각했나
한국은행(공식 콘텐츠)은 1900~1905년을 “백동화 인플레이션” 시기로 지칭하며, 당시 신문 논설을 인용해 쌀값이 약 6개월 동안 7배로 폭등하는 등 극심한 물가 상승이 있었다는 취지로 소개한다.
여기서 핵심은 “동전이 많아졌다”가 아니라, 가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통화가 시장을 덮쳤다는 점이다.
2-2. 왜 ‘보조화’ 남발이 인플레를 만들었나
근대 화폐제도에서 보조화(백동화/동화)는 ‘잔돈’ 역할이다. 본위화(금화/은화)나 그에 준하는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보조화의 유통이 안정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현실은 달랐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근대 사료 DB)는 전환국이 본위화를 주조하지 않고 주조 이익이 큰 백동화를 남발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백동화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며 사회경제적 문제로 번졌다는 맥락을 제시한다.
정리하면 구조는 이렇다.
- 본위화(신뢰의 기준) 부족
- 보조화(백동화) 공급 과잉
- 실물 거래에서 “받아도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 형성
- 가격이 더 빨리 오르며 인플레 심화
3. 화폐조례(1901): 금본위 ‘선언’과 ‘실행 실패’의 간극
3-1. 화폐조례의 핵심 내용
우리역사넷은 1901년 화폐조례가 한국 최초로 금본위 화폐제도를 규정했고,
- 금 2푼의 가치를 1환으로 규정
- 금화 20환·10환·5환을 본위화로
- 은화·백동화·적동화를 보조화로
- 100전=1환(50전=반환)
등을 명시했다고 정리한다.
또 다른 우리역사넷 해설에서는 이 조례가 백동화 남발로 문란해진 폐제를 시정하려는 목적이었지만, 금준비(지금준비)를 위해 차관 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면서 본위화 주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3-2. “현실적 실패 요인” 4가지
화폐조례가 ‘틀’로는 근대적이었는데 왜 작동하지 못했는지, 자료 기반으로 실패 요인을 현실적으로 정리하면 다음 4가지가 크다.
(1) 준비금(금) 확보의 실패
금본위는 ‘법령’이 아니라 금이라는 실물 준비가 있어야 작동한다. 차관 실패와 금 확보의 제약은 본위화 주조를 막는 결정적 장애가 되었다.
(2) 기존 유통(백동화/은화/외국화폐)의 관성
시장에는 이미 여러 화폐가 혼재했고, 갑자기 새로운 단위를 “국가가 선언”해도 사람들이 곧바로 믿고 바꾸지 않는다(교환 비용·손실 우려).
(3) 보조화의 질·등급 문제와 교환 충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백동화를 갑·을·병종으로 구분했고, 일부만 정상 교환되거나 낮은 가격으로 환수되는 과정에서 피해가 발생했으며, 교환 이후 금융 공황과 상인 도산이 이어졌다는 취지로 서술한다.
즉, “정리 사업”은 필요했지만, 그 방식이 시장에 충격을 줬다.
(4) 통치·외교 환경의 불안정
근대 화폐제도는 안정된 행정력과 국제 신용이 필요하다. 대한제국 말기의 정치·외교적 불안정은 “제도 신뢰”를 근본에서 흔들었다.
4. 일제강점기: 조선은행권과 ‘전시경제’의 통화 팽창 메커니즘
4-1. 조선은행권은 어떻게 통치 장치가 되었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설명은 1911년 (구)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출범했고, 은행권 발행이 가능했으나 양식·종류가 총독 허가 사항이었다는 점을 명시한다. 또한 1914년 100원권, 1915년 1·5·10원권 발행을 정리한다.
즉, 발행권은 금융기술이 아니라 식민 통치의 권한으로 편입되었다.
4-2. 1937년 이후 전시경제: 통화 수요 폭증과 발권 한도 확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은행 항목)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통화 수요가 급증했고, 일본은행과 조선은행이 보증준비 발행한도를 확장해 대응했으며, 기존 절차가 탄력적 대응에 불리해 발권제도 개정으로 이어졌다는 취지로 설명한다.
동시에 전시체제 연구 논문(PDF)은 전시경제 하에서 주민이 조세·강제저축 등으로 소득을 재흡수당하고, 만성적 전시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 속에서 생활이 피폐해졌다는 맥락을 제시한다.
정리하면 전시경제에서 화폐는 이렇게 움직였다.
- 전쟁 수행 비용 증가 → 자금 동원 필요
- 통화 수요 급증 → 발권 한도 확장/제도 개정
- 물자 부족 + 통화 팽창 → 인플레 체감
- 통제·배급·가격 규제가 강화(생활경제 압박)
5. “백동화 인플레” vs “전시경제 통화 팽창”
| 구 분 | 백동화 인플레이션(1900~1905) | 전시경제 통화 팽창(1937~1945) |
| 촉발 요인 | 보조화(백동화) 남발 + 본위화 부족 | 전쟁 비용·동원경제 → 통화 수요 급증 |
| 제도적 배경 | 금본위 ‘선언’은 있었으나 준비금/집행력 부족 | 발권 한도 확대·발권제도 개정 등 관리통화 성격 강화 |
| 체감 결과 | 단기간 물가 급등(쌀값 급등 사례) | 물자 부족 + 만성 인플레 + 생활 통제 강화 |
| 피해 양상 | 교환/정리 과정에서 시장 충격·손실 | 조세·강제저축·통제경제로 생활 압박 |
6. 체크리스트: “근대 화폐제도 실패”를 판별하는 7가지 질문
- 본위화(또는 준비자산)가 충분한가?
- 보조화 발행이 본위화/준비에 비례하는가?
- 발행 주체가 통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가?
- 교환·정리 정책이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는가?
- 통화 팽창이 실물 공급과 균형을 이루는가?
- 물가/배급/통제 정책이 국민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가?
- 국제 환경(본위 전환, 전쟁 등)이 통화에 어떤 외압을 주는가?
7. 맺음말: 대한제국의 ‘돈’과 일제강점기의 ‘돈’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대한제국은 법령과 기구를 만들며 근대 국가의 형식을 갖추려 했다. 그러나 백동화 인플레는 “제도는 선언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교훈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행권은 그 반대 방향에서 교훈을 준다. 화폐제도는 ‘작동’했지만, 그 작동은 국민의 번영이 아니라 통치와 전쟁 동원을 위해 설계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근대 화폐사를 읽는다는 것은, 옛돈을 수집하는 취미를 넘어 발행권·신뢰·생활경제라는 세 가지 축으로 국가의 운명을 읽는 일이다. “돈”은 가장 일상적인 물건이지만,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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